경주역사유적지구(32)...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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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32)...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7.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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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지구(III : 계림 및 월성)

<계림(鷄林)>

첨성대의 과학성을 본 후 월성지구에 있는 계림으로 향한다. 글로만 보면 먼 곳에 있는 곳처럼 보이지만 지척지간이다. 계림은 나정과 더불어 신라인들이 매우 중요시하던 장소이다.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김알지는 신라 미추왕(262~284)과 내물왕(356~402)의 선조인데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는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탈해 이사금때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 호공(瓠公)을 보냈다. 호공이 가보니 보라색 구름이 하늘에서 드리웠고 작은 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궤를 열자 외무가 준수한 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씨 시조인 알지다. 그 뒤로 시림이라는 이름을 고쳐 계림(鷄林)으로 고쳐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의 탄생과 함께 신라는 국호를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고쳤다고 한다. 계림이란 국호는 다시 사로(斯盧)로 바뀌었다가 지증왕 4년(505)에 신라로 고정된다. 그러나 계림은 후대에도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천축국(天竺國, 인도) 사람들이 신라를 ‘구구타예설라(矩矩타䃜說羅)’라고 불렀는데 ‘구구타’은 닭을 말하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라고 적었다. 또한 인도 사람들은 ‘신라사람들이 닭신을 받들기 때문에 날개깃을 꽂아서 장식한다.’고 적었다. 최고 지배자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고구려나 가야의 건국신화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고대 사회의 최고 지배층은 자신이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혈통을 신성시하고 지배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김알지의 탄생신화는 김씨 집단이 일찍부터 외부에서 이주해온 집단임을 암시한다. 탈해왕은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지만(탈해왕은 석씨) 왕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한다. 이는 아마도 김알지를 정점으로 하는 이주세력이 아직 완전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정황으로 해석한다. 경주 김씨가 왕이 되는 시기는 262년 미추왕이 13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그는 김알지의 6세손이다. 근래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김알지(가야의 김수로 포함)는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였던 김일제의 후손으로 신라 56왕 중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이 부분은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인 내물왕릉(사적 188호)은 계림 안에 있는 무명의 무덤과 함께 있다. 내물왕릉은 남산지구의 세계유산으로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2중 지정임을 앞에서 설명했다. 내물왕은 김씨 성으로는 미추왕에 이어 두 번째로 왕이 되며 비로소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내물왕은 눌지왕, 박제상의 일화로 유명하다. 내물왕 재위 시절 신라는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에 밀려 작은 소국에 불과했다. 이에 내물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이 서거한 디 왕자가 아직 어리자 고구려에서 귀국한 실성이 제18대 왕으로 즉위한다. 실성왕 즉위 원년(402) 왜국과 조약을 맺자 왜국은 내물왕의 세 번째 아들인 미사흔을 인질로 요구했다. 자신을 볼모로 보낸 내물왕에게 감정이 있는 실성왕은 조건 없이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실성왕 11년, 이번에는 고구려에서 인질을 원하자 실성왕은 전혀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내물왕의 두 번째 아들 복호를 볼모로 고구려에 보냈다. 실성왕 16년에 왕은 내물왕의 큰 아들인 눌지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생명의 위험을 느낀 눌지가 경주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19대 왕인 눌지왕이다. 왕에 오른 눌지는 왜국과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두 동생을 빼내오려 했다. 이때 추천된 인물이 박제상이다. 고구려에 들어간 박제상은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무사히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박제상은 집도 들르지 않고 왜국으로 떠나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자신은 탈출하지 못하고 발각되어 화형을 당했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나는 날 그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가다가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는데 그곳이 지금의 망덕사지 남쪽 장사(長沙)라는 곳이다. 사람들이 부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두 다리가 굳은 채 뻗지를 못하므로 그때 부인이 앉아 있던 장소를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 훗날 부인은 죽은 남편을 그리며 남선 남쪽의 치술령에 올라 망부석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때 그 영혼이 새가 되어 날라 가 은을암에 숨었는데 이때 울주군 두통면 만화리에 있는 길이 260센티미터, 너비 185센티미터의 고인돌 위에서 쉬었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현재 울산시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사람들이 박제상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이후 조선시대에 치산서원이 세워졌으며 근래 이곳에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박제상 유적(치산서원)을 복원했다. 내물왕릉은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 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적석목곽분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부 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횡혈식 석실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황남대총(98호분)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 월성>

경주월성(사적 제16호)은 파사왕 2년(101)에 축조된 왕궁이다. 그동안 신라 왕들은 혁거세왕이 창림사 터에 쌓은 엉성한 궁궐에서 살았지만 나라 형편이 좋아지자 번듯한 왕궁을 건설한 것이다. 월성은 계속해서 신라의 왕성이었는데 5세기 후반 명활산성에서 왕족들이 거처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왕성으로 남아있었다. 전체 길이는 약 1.8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토성인데 높이는 남쪽이 다른 쪽보다 좀 낮다. 성벽과 바로 접해 있는 남천이 자연적인 해자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인공으로 해자를 만들었는데 1979〜1980년에 북쪽 해자를 발굴한 뒤 일부 구간을 복원했다. 이때 뻘 속에서 많은 목간이 나왔다. 월성은 위에서 바라본 모습이 반달 모양 같다고 해서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며 국왕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유사』 <탈해왕>에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서로 다투었다. 시비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소.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탈해가 속임수로 호공의 집을 빼앗은 곳이 바로 월성이다.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남해왕은 탈해를 지혜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오늘날 같으면 탈해는 남의 집을 빼앗은 파렴치범으로 몰려 상당히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당대에는 거짓말 자체도 기지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석씨로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탈해가 왕에 오르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라 했다는 것이다.

탈해가 석씨라는 성을 받은 것은 남의 집을 빼앗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와 같으면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도둑이라는 성을 준다면 반발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석탈해가 탁월한 거짓말쟁이 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대단한 재주로 생각했음은 틀림없다. 학자들의 면밀한 관찰에 의하면 원숭이류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지구상에서 거짓말을 유유히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도 거짓말쟁이의 능력에 혀를 두르는데 과거에는 더욱 더 사람들을 놀라게 했음은 틀림없다. 위 이야기는 석씨 집단이 외부로부터 이주해 와서 토착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특히 탈해의 조상이 숫돌과 숯을 기본으로 하는 대장장이라는 것이야말로 북방에서 내려온 철기를 다룰 줄 알았던 외래 이주민으로 볼 수 있는데, 당대에는 철기를 아는 탈해가 왕이 될 정도로 대장장이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북방 기마민족에게 절대로 필요한 말갖춤과 무기를 대장장이가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탈해에게 집을 빼앗긴 호공은 탈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를 보좌했던 인물로 왜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으로 알려진다. 여하튼 거짓말로 대성공하여 왕까지 된 석탈해는 이곳을 왕성으로 정했는데 제5대 파사왕 때 왕성으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파사왕은 석벽을 쌓아 성으로의 구실을 하도록 한 후 파사왕 22년(101) 금성에서 월성으로 이거했다.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진 창림사터는 풀로 지붕을 덮고 나무울타리를 두른 간단한 시설로 알려지므로 반월성이야말로 궁궐다운 면모를 갖춘 최초의 궁궐로 생각한다.

월성이 궁성이 되면서 점차 궁궐 영역을 확장하여 전성기에는 귀정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을 비롯하여 월상루, 명학루, 망덕루 등의 누각이 있었고 성안에는 건물들이 조밀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둘레에는 인공해자를 설치하였으며 남쪽은 절벽 밑을 흐르는 남천을 해자 삼아 석벽을 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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