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3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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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3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성호 기자
  • 승인 2019.07.2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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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지구(II)

특징적인 첨성대의 모습 때문에 남다른 논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인데 남천우 박사는 첨성대가 천문관측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첨성대가 제단으로는 불편한 것은 물론 건조 양식이 『주비산경』과 연관된다는 설명은 도형이나 수치에 대한 임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문중양 박사는 첨성대가 외형으로만 보면 땅 위에 만들어 세워 놓은 우물과 같다며 신라인들에게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풍요의 상징으로 영성단과 같은 제단의 기능도 함께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 박사는 고대 사회에서 ‘천문을 묻는’ 행위와 현대의 천문학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활동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 천문학에서 천문 관측은 객관적인 대상물로서의 천체의 운행과 변화하는 현상들을 관측하여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천문을 묻는’ 행위란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사회에서 ‘천문’이란 현대 천문학에서와 같이 ‘객관적인 천체 현상’과는 다르게 ‘하늘의 뜻’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천문을 묻는’ 행위는 피상적으로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중양 박사는 나아가 고대인들에게는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천변재이(天變災異)로부터 무사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므로 결국 ‘천문을 묻는’ 행위는 거시적으로 지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하늘 신에게 인간들의 바람을 기원하는 제례 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추정했다. 무언가의 의식을 치루기 위해 제주가 정상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첨성대가 제단의 기능을 지니고, 불교적‧토속 신앙적 염원을 담은 조영물이었다고 해서 천문대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첨성대에 대한 논쟁은 계속 이어져 일본천문학자 야부우치는 천문대설을 지지했고 나일성은 첨성대가 충분히 관측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천문대임을 주장했으며 건축사가 신영훈은 점성과 환구의 몫을 한 시설물로 추정했다. 반면에 박성래 교수는 1993년에 『한국인의 과학 정신』에서 첨성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소 정리하여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1996년 9월에 열린 제9회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도 첨성대가 훌륭한 고대 천문대라고 대체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도 첨성대의 모습이 조선시대의 천문대인 관천대와 흡사하다는 것도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크기도, 높이도 둘 다 비슷하다. 김봉규 박사는 첨성대가 제단이 아니란 것은 『삼국사기』를 보아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첨성대를 건축학적으로 보면 유연하고 아름다운 병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세계의 많은 석조 구조물 중에서 이러한 형태를 지닌 구조물은 유례가 없으며, 이것이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균형 잡힌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도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원통부의 완만한 반 곡선 형태를 채택하였고 여기에 기능에 알맞은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기단에서부터 둘레 약 15.5미터인 원(제1단)을 만들면서 거의 같은 두께의 돌을 12단까지 쌓아 완만한 곡선을 만들고, 13에서 15단까지의 사이에 네모난 구멍을 만들었다. 이 네모난 구멍(약 95x95센티미터)은 정남이 아니라 약간 서쪽을 향하는데 이 구멍은 관측자들이 첨성대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출입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3단을 더 쌓아 올린 다음 제 19단에는 네 방향으로 밖을 향해 튀어나온 돌이 있다. 건축 구조상 안전을 위한 조치인지 아니면 관측 기기를 설치하는 데 사용되는 부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돌출된 돌은 제25단과 26단에도 있다. 이것은 마지막 단인 제27단의 높이에 맞는 바닥돌을 얹어 놓기 위한 지지대(대들보)인 동시에 몸통의 돌들이 이완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몸통은 기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씩 가늘어지다가 제19단에 이르면 거의 같은 둘레를 지키면서 21단에서 23단까지는 직선과 직선을 연결하는 이변곡선(移邊曲線), 24단에서 27단까지는 수직직선(垂直直線)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내물림 구조 자체는 아치구조법이 사용되기 전에 통용된 구조법이다. 마지막 제27단의 둘레는 약 8.95미터이며 총 365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몸통 위에 눕혀 놓은 2단으로 된 긴 돌기둥이 정(井)자 모양으로 상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2단으로 눕힌 돌기둥은 서로 벌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몸통의 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무겁게 누르는 역할도 함께 한다.

첨성대의 설계자는 내부 정자석의 배치, 원주부 하부에 채운 흙, 창구의 위치 등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여 안정성과 기능적 곡선미에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특히 11단 아래에 채워져 있는 흙은 원형으로 인한 변형에 저항할 수 있는 내력을 만들어 축조 시에 무너지는 위험을 감소시켰고, 완공 후에는 외력과 기초부 등, 침하 및 지진으로 인한 진동 등에 대비하여 첨성대의 원형을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가 세워진 후 경주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지진이 일어났는데 접착재도 사용하지 않은 첨성대에는 지진 피해를 입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하투과 레이더 탐사법으로 첨성대의 지층 구조를 조사해 본 결과 첨성대의 지하와 주변을 인공적으로 공고하게 기반을 다진 것이 확인 되었다. 즉 건축 당시 땅을 깊게 파서 큰 돌을 채웠고 특히 첨성대 바로 아래 부분에는 더 많은 돌들을 채웠다. 한마디로 첨성대의 장인들은 안정성과 기능은 물론 심미적인 면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다는 뜻으로 1300여 년 간 비바람과 지진을 견딘 첨성대의 비결이야말로 신라 건축 기술과 예술의 개가인 셈이다. 첨성대를 겉모양만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첨성대의 효용도 여부는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만약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면 첨성대의 꼭대기에서 천문 관리가 바라본 신라의 밤하늘은 어떠했을까가 의문점이다.

경주에 위치한 신라역사과학관에 신라의 밤하늘을 재현한 천문도(天文圖)와 혼상(천구의)이 전시되어 있다. 천문도와 혼상은 연세대학교 나일성 교수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6년인 서기 637년의 별자리 위치로 계산한 것이다. 혼상이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에 따라 천구면에 표시한 것으로서, 별의 제작 방법은 천문도와 동일하지만 천장에 평면적으로 그린 천문도와는 달리 일주 운동에 따라 회전하면서 별들이 지평선에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천문도와 혼상이 첨성대를 둘러싼 중요한 의문 두 가지를 해결해 주는 뜻밖의 결과를 보여준다. 첫째는 첨성대가 왜 지금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졌는가이다. 혼상이 놓여 있는 나무 판자의 가장자리에 첨성대를 중심으로 첨성대에서 보이는 산들을 배치하였는데 그 결과 북쪽 부분에 산이 없이 뚫린 부분이 생겼다. 이것은 첨성대의 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관측하기에 적합한 자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두칠성은 첨성대에서 바라볼 때 북쪽의 지평면에서 가까운 곳의 밤하늘에 떠올랐다. 북두칠성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첨성대는 북쪽 부분이 산에 가리지 않고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북한의 개성시 외곽지대에 있는 고려의 첨성대,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의 경우 높이는 첨성대에 못미치지만 하늘을 관측하는데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번째는 고대 천문도에 표시되어 있는 5등성의 희미한 별에 북극이라고 적혀 있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이 별은 현재의 하늘에서는 북극에서 약 6도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기린자리에 속해 있지만,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중국에서 별자리를 정하던 당시에는 북극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시대에는 이 별이 북극에서 불과 1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신라 시대 사람들이 그 별을 북극이라고 부른 것이 결코 오류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먼 별까지의 거리를 감안했을 때 높은 산에서 보는 것이나 평지에서 보는 것이나 차이도 없고, 오히려 높은 산으로 올라 다니는 불편함을 감안할 때, 평지에서 자주 관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더구나 평지일지라도 굳이 높은 대를 만들어 놓고 관측할 필요도 없다. 사실 첨성대의 높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봉규 박사는 천문대라는 특정 건물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매우 춥거나 더운 날 혹은 개인적 사정이 있을 때 첨성대와 같은 건물이 없으면 천문관이 관측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왕은 직속의 천문관 아닌 지방의 관료로부터 천문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데 그들의 보고는 전문가들의 관측결과가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 『고려사』에 그런 기록이 확인되는 것을 볼 때 천문관이 보다 수월하게 매일 빠지지 않고 하늘을 관측할 수 있도록 첨성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첨성대에 문이 없는 이유도 설명했다. 문이 없기 때문에 사다리로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거기에는 좁지만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누군가가 다시 사다리를 가져올 때까지 천문관은 꼬박 밤을 새워 별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만든 첨성대는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의 천문기록 즉 첨성대가 만들어 진 직후의 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라 전체를 감안하면 이전의 같은 기간보다 무려 5배나 많아졌으며 천문현상의 기록도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나일성 박사는 첨성대의 효용도에 대해 매우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국사기』에 첨성대가 완성된 후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볼 때 첨성대 아래에서 물시계로 정확한 시각 층정을 하는 동안 첨성대 꼭대기에서 조위가 서술한 대로 규표로 태양으로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서 1년의 길이를 정하기도 하고 해와 달을 관찰하여 절기를 구별한다. 또한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살피고 별을 관찰하여 국운을 점치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런 관측은 맨 눈으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첨단 과학이었다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천문학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발달했다. 백제는 천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관부라는 기관이 있었고, 백제에서 사용한 역(歷)은 고구려와 같은 것이었다. 6세기부터 새로운 역을 쓰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1년의 길이를 365.2467일로, 한 달의 길이를 29.5306일로 썼다. 백제는 일식, 월식, 행성, 유성, 지진, 우박 등에 대해 세밀하게 관측하였는데, 『삼국사기』에 혜성에 관한 관측 기록만 15건이나 있다. 특히 87년에 있었던 일식에 대한 기사는 매우 일찍부터 천문 관측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554년에는 왕보손이, 602년에는 관륵이 천문 관측방법과 역법, 지리책 등을 일본에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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