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이 기사는 39회로 연재됩니다.
황복사터를 나서면 곧바로 경주 시내인 황룡사지구로 연결되지만 인근에 진평왕릉(재위 579∼632, 사적 제180호), 설총묘(경북기념물 제130호),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호), 효공왕릉((재위 897∼912, 사적 183호)이 있으므로 이들을 답사한 후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이들을 먼저 답사한 후 낭산을 답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므로 각자의 선택에 따르기 바란다.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사륜이라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동생인 사륜이 왕위를 이었는데 진지왕이다. 그런데 진지왕(재위 576〜579)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과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 당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하늘로부터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옥대는 황룡사의 장육존상, 9층탑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보물로 꼽히는 것이다. 왕은 국가적인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옥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신라 초대왕인 박혁거세 다음으로 가장 긴 53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이때 많은 중앙 관청이 새로 설치되어 지배체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또한 원광(圓光)과 담육(曇育) 등의 승려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도 힘썼다. 진평왕 6년(584)에는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잇달아 국경을 침범해오자 남산성, 명활성, 서형산성(西兄山城) 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였다. 김유신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또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으며, 608년에는 원광을 시켜 수나라에 청병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 양제(煬帝)의 허락을 받기도 하는 등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봉분 높이 7.6미터 지름 38미터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하부를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같이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을 마련한 예는 아달라왕릉 등 신라왕릉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진평왕릉은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진평왕의 뒤를 이은 사람이 선덕여왕이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31년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일으키자 진평왕은 반역자들을 참형에 처한 후 그의 가족 9족을 멸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헌상에 남아있는 최초의 9족멸(九族滅) 사건이다. 진평왕이 철저하게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은 자신이 죽은 뒤 여왕이 될 선덕여왕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으로 추정한다.
진평왕릉 동쪽에 원효와 요석궁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 경덕왕 대의 대학자이며 신라10현 중 한 명인 설총의 묘로 전해지는 묘(경북기념물 제130호)가 있다. 지름 15미터 높이 7미터로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의자가 있는 상석이 하나 있는데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의 모양이 특이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고 단순하나 보존은 잘되어 있는 편이다. 경주 설씨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설총은 한자에 토를 달아 만든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인물로 왕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고 저술로 『화왕계』가 있다. 현종 13년(1022)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어서 낭산과 명활산성 사이에 광활한 농지가 나타나는데 황룡사 사리탑과 함께 경문왕 대인 ‘중화 3년(883)’이 적힌 금동사리함에 ‘보문사의 현여대덕이 『무구정광경』에 의해 작은 탑 77개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보문사가 이곳에 있던 사찰로 짐작한다. 다만 금동사리함에 ‘김유신을 위해 석탑을 만들었고 883년에 다시 수리했다’라는 기록을 보아 금동사리함 자체는 보문사와 관계없다고 추정한다. 학자들은 김유신의 명복을 빌던 사찰은 취선사이므로 이곳에 있던 석탑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보문사의 금당터, 동⋅서탑터로부터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보물 제123호)가 있다. 당간지주 안쪽면은 평면이며 나머지 세 면의 아래쪽은 잘록하고 그 위는 점차 가늘어진다. 상⋅중⋅하 세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이 남아 있다.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 있는데 이런 형태는 매우 드문 예이다. 높이 3.8미터이며 두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다. 보문사 터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조(보물 제64호)가 보이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물을 담아 연꽃을 기르던 것으로 추정하여 ‘석연지’라고도 부른다. 보문사터에 온전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유물 중 하나로 물통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본다. 가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는데 파낸 깊이 0.61미터, 길이 2.43미터, 너비 1.85미터이며 내외부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 안에 있는 4개의 물통 모두 장식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